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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피 coffee

한국의 다방, 커피자동자판기,커피 믹스의 첫등장

by LALAPULL 2023. 1.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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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다방 역사에서 1960년 대는 가장 변화무쌍한 시기다. 6·25 전쟁과 4·19 혁명, 5.16 군사정변 등 혼돈의 터널을 겨우 빠져나와 사회 시스템이 작동하기 시작 때다. 근대화, 산업화, 도시화의 거센 물결 속에서 다방도 더는 지식인만의 전유물일 수 없었다. 대학생들에게는 시를 읊고 팝송을 듣는 문화 공간으로, 대중 예술인에게는 데뷔 무대가 되어주었다. 그들은 다방에서 미니 콘서트를 열며 대중문화의 불씨를 키웠다. 흔히 먹고살기 급했던 시절로 기억되는 1960년대에는 영화 제작도 활발해 국민 1인당 1년에 5~6편을 본 것으로 기억된 시기이기도 하다. 2015년에 개봉된 영화는 1960년대 말 서울대생 조영남이 서울 무교동의 극장형 다방 "쎄시봉 팝송을 부르는 장면으로 시작된다. 객석에서 순서를 기다리는 연세대생 윤형주는 진한 원두커피에 계란 노른자를 넣어 휘휘 지어 마신다. 1960년대에서 1960년대로 넘어가는 시기의 다방을 특정하는 키워드로는 젊은이 음악 계란 동동 모닝커피 등이 꼽힌다. 명동에는 오비스 캐빈, 종로 2가에서는 쉘부르가 음악다방 전성기를 함께 이끌었다. 이곳의 주무대로 가수 송창식, 신중현 밴드, 어니언스, 김정호에 이어 양희은, 이문세, 최성수, 개그맨 주병진 등이 활동하면서 통기타 문화를 전파했다. 그러나 다방은 대중화에 뒤따르기 마련인 퇴폐화의 부작용도 극복해야만 했다. 손님들을 끌기 위한 다방들 간의 치열한 경쟁은 마침내 얼굴마담과 레지라는 새 직업군을 만들어냈다. 산업화 물결을 따라 큰돈을 벌겠다고 서울로 몰려든 인파에는 젊은 여성들도 있었다. 1970년 당시 커피 한 잔 값은 50원이었다. 갈 곳 없는 무직자나 한량들은 50원만으로 종일 다방에서 진을 치며 시간을 때울 수 있었다. 한편으로 50원은 근로자들에게 적은 돈이 아니었다. 1970년 11월 서울 청계천 평화시장에서 분신한 22세의 청년 전태일은 하루 14시간 일하고 받는 일당이 겨우 커피 한 잔 값이라며 절규했다. 한국 다방 역사는 굴곡과 부침이 잦았다. 자세히 뜯어보면 다방은 불화 속에서 발전해 왔다. 프랑스 철학자 자크 랑시에르의 합의를 추구하기보다는 불화를 용인하는 것이 차라리 민주주의의 핵심이다.라는 말은 다방 변천사의 동력을 간파하는 프레임이 될 만하다. 다방의 생명력은 외부 요인에 의해 심하게 요동치기도 했다. 1968년 5월 설립된 동서식품은 1970년 6월부터 맥스웰하우스라는 상표로 인스턴트커피를 생산했다. 다방 주인들에게는 희소식이었다. 수입해 사용하는 원두커피는 비싼 데다 사치품이란 눈총을 받던 터였다. 반면 인스턴트커피는 국내에서 안정적으로 조달할 수 있었고 원가도 절감되었다. 원두커피를 확보하지 못한 다방 주인이 미제 커피 찌꺼기에다 톱밥과 콩가루, 계란껍데기 등을 섞은 가짜 커피를 팔다 적발되기도 했다. 원두커피를 기준보다 조금 넣고 담배꽁초를 섞어 맛을 강하게 만들어서 판 이른바 꽁치 사건도 벌어졌다. 인스턴트커피의 대량생산은 다방 주인들에게는 무엇보다도 곤조가 심한 고액 연봉의 주방장을 쓰지 않고 자신이 손쉽게 커피를 만들 수 있다는 점에서 두 팔 벌려 환영할 일이었다. 그러나 동서식품의 등장은 다방에 계륵이기도 했다. 1976년 12월 23일 동서식품은 세계 최초로 간편하게 물에 타 마시는 커피믹스를 개발해 시판했다. 커피를 직장에서 손쉽게 만들어 마실 수 있게 되자 다방을 찾는 사람이 줄었다. 동서식품으로서는 인스턴트커피를 대량으로 사용하는 고객인 다방을 홀대할 수는 없었다. 일본 전문가를 초빙해 다방 경영을 위한 세미나를 열면서 민심 추스르기에 나섰다. 다방도 자구책 마련에 골몰했는데, 이때부터 다방은 크게 두 갈래로 나뉜다. 젊은 고객이 많은 다방들은 인기 DJ를 스카우트해 전문 음악다방으로 변신하면서 생명을 잇고자 했다. 반면 중장년을 대상으로 한 다방들은 커다란 텔레비전을 설치해 스포츠 중계와 뉴스를 틀어주는 동시에 마담과 배달서비를 강화한 게 이때다. 1977년 롯데 산업이 일본 샤프사에서 커피자판기 400대를 도입해 국내에 풀었다. 회사 복도, 도서관 휴게실, 대학 캠퍼스 등 커피자판기가 있으면 그 주변이 다방이 되었다. 1978년 커피자판기 1,100대가 전국 주요 공공장소에 설치되었는데 , 하루 평균 총 15만 컵이 판매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1978년 커피 자동자판기가 전국주요 장소에서 설치되면서, 직장 여성들은 커피를 타오라 는 심부름에서 해방되었다.  그럼에도 1978년 말 전국의 다방은 1만 752곳에 달했고, 서울에서만 4,000곳에 육박하는 등 여전히 맹위를 떨쳤다. 야간 통행금지 해제는 젊은이들이 드나들던 다방에 상대적으로 큰 도움이 되지 못했다. 이들 다방은 간판을 커피숍으로 바꿔 달며 다방과 차별화를 시도했다. 이들에게 돌파구가 마련된 것은 1988년 서울올림픽이었다. 해외여행 자유화와 적극적인 문화 개방과 교류 덕분에 서구의 선진화한 커피숍이 늘어났다. 이에 앞서 1987년 커피 수입 자유화 조치까지 시행되면서 사치품으로 묶였던 원두커피를 자유롭게 수입하는 업체가 늘었다. 1988년 12월 서울 압구정파출소 앞에 쟈뎅을 시작으로 마침내 국내에서도 원두커피 전문점 시대가 열렸다. 이는 1920~1930년대 지식인들이 손수 추출하던 원두커피로 귀환하는 것이다. 원두커피의 르네상스 시대를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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